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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한위스키 05

Kai x D.o.


카디 독한위스키 05

W. 율이



박찬열.


찬열을 바라보고 있으면 고개가 꽤 아프다. 그는 D전자 마케팅 3팀에서 유일하게 키가 185cm가 넘었는데,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기서 여직원들에게 애인으로 삼고 싶은 남자 1순위는 물론이고 유쾌한 성격 탓에 남직원들도 찬열을 좋아했다. 입사한지 몇 달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을 잘해서 경수도 찬열을 좋아했다. 

딱 한 가지만 빼고. 찬열은 말이 너무 많았다.


"대리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으세요."

찬열이 허스키한 목소리로 경수의 안부를 물었다. 어디 아프냐고? 경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다. 아니, 아픈 건 아니고 좆같아요. 김종인이란 놈 때문에.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경수는 생각나는 대로 말을 내뱉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아뇨, 그냥 조금 피곤해서요. 라고 대답했다. 경수는 사실 찬열이 여기까지만 물었으면 했다. 하지만 찬열은, 말이 너무 많았다. 


"피곤하세요? 피곤할 땐 단 게 최고라던데, 초콜릿 더 드릴까요? 참, 옆에 카페에서 커피 사 오려고 하는데 대리님도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이대리님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드신다고 하셨고, 정과장님은 자바칩 프라푸치노? 아무튼 그거 드신다고 하셨거든요. 도대리님도 필요하시면 저한테 시키세요!"

어떻게 사람이 한 번에 이렇게 많은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경수로썬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끊임없이 말하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찬열은 아마 말하는 능력이 타고난 걸 거다. 경수는 찬열이 이 팀에서 아무리 일을 잘한다고는 하지만 마케팅부보다는 영업부에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가끔 했다. -D전자는 마케팅부와 영업부가 나누어져 있다.- 어쨌든 경수는 귀찮더라도 찬열의 말에 대답을 해 줘야 했으므로 괜찮습니다. 한 마디 했다. 경수는 그 대답으로 찬열의 입을 막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경수는 찬열의 말하기 능력을 과소평가 한 죄로 몇 마디 더 들어야만 했다.

"항상 도대리님은 괜찮다고만 하시고, 힘드신 일 있으면 좀 말도 하시고 하세요. 항상 혼자 다 짊어지시는 것 같아서 걱정이에요. 아, 이따가 점심 같이 드실래요? 제가 이번에 맛집을 찾아냈거든요. 구내식당 말고 오랜만에 맛있는 거 한 번 땡겨보려고요."

결국 경수가 네, 그래요. 그런데 찬열 씨는 일 안 하세요? 라고 해서 찬열의 입은 마침내 다물어졌다.


경수는 왠지 아까보다 더 피곤한 느낌이었다. 어쨌든 피곤하긴 했지만 더 이상 김종인 생각이 나지 않아서 나름 기분은 나아졌다. 찬열이 귀찮기는 했어도 꽤 도움이 된 모양이었다. 






*





종인은 일주일간 나름 바쁜 생활을 했다. 사실 도경수에게 키스 한 다음 날 눈을 떴는데 전 날 생각이 그대로 났다. 백현과 술을 마신 것부터, 도경수가 본인에게 미친 새끼라고 칭하며 도망치듯 종인의 집을 나선 것까지. 종인은 조금 절망했다. 도경수에겐 게이인 척하려고 했던 건 맞았지만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종인 자신도 남자끼리 하는 키스 같은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종인이 그 말도 안 되는 것을 했다. 직접. 그런데 종인이 더 절망스러워했던 것은 도경수와의 키스가 나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어쨌든 종인은 그 키스가 꿈이길 바랐다. 하지만 선명히 나는 그 기억에 더 이상 부정할 수가 없었다. 도경수를 볼 낯도 없었다. 그래서 연락하지 않았다. 그 덕에 종인은 더 일을 열심히 했다. 아버지가 웬일로 열심히인 종인을 따로 불러 칭찬하는 일까지 생겼다. 이것은 도경수 때문에 생긴 변화였다. 심지어 종인은 그 때 그 포장마차에서 경수가 자신을 친구 대하듯 했던 말투가 꽤 마음에 들었다. 그 말투라 함은 존댓말이 아닌 반말이었다는 특징이 있는데 그냥 종인은 그게 경수가 자신을 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 보여서 좋았다. 요즘 자꾸 도경수에게 드는 이 요상한 감정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은 갔지만 종인은 인정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도경수를 안 볼 수는 없었다. 아직까지 아버지가 종인에게 주신 그 미션은 유효했다. 모든 것을 알아낼 정도로 도경수와 친해지라던 그 말. 종인은 해내고 싶었다. 그래서 도경수에게 다시 연락했다. 물론 겉으론 안 그래 보였지만 종인으로선 꽤 용기 낸 것이다.



- ··· 김종인 씨...?

종인은 괜히 실망했다. 그놈의 존댓말 때문이다. 대체 언제까지 도경수는 존댓말을 고사할 건지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분명히 그땐 존댓말 안 썼잖아! 


"잘 지냈어요?"

하지만 종인은 티 내지 않았다.

- 잘 지냈겠어요?

그런데 돌아오는 경수의 대답에 종인은 약간 기분이 좋아졌다. 비록 도경수 말투는 여전히 까칠하기 짝이 없었지만 마치 이 대답은 김종인 너 때문에 신경 쓰여서 잠도 못 잤어. 라고 하는 것 같았다. 사실 종인은 도경수가 벌써 그 키스를 잊었으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도 조금 있었다. 꿈이길 바라긴 했지만 이왕 현실이라면 자신이 도경수와의 키스를 잊지 못하는 것처럼 도경수도 김종인과의 키스를 잊지 않았으면 했었다.


"왜?"

- 지금 이 전화도 받기 싫었는데 일 때문인가 해서 받은 거예요. 쓸데없는 얘기할 거면 끊을게요.

"하여간 도경수 성격 급하다니까."

- 제가 김종인 씨 친굽니까?

종인은 일주일 만에 듣는 경수 목소리가 좋았다. 외모와는 딴판인 굵직한 저음에 꽤 부드러운 도경수의 목소리는 누구나 반할 만큼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이젠 도경수의 쌀쌀맞은 말투 같은 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종인은 사실 일주일간 생각을 많이 했다. 그리고 김종인 제 자신과 많이 타협했다. 도경수는 김종인의 새로운 장난감이야. 그것뿐이야. 하지만 이미 도경수는 종인의 마음 한 켠에 들어가 있었다. 종인도 제 감정을 일찍이 알아차렸다. 하지만 인정하진 않았다.

내가 진짜 게이일 리 없어.


"형 동생 하자고 해서 오케이 한 사람이 누군데, 예의 따지고 있어요. 저번에 자기도 반말 썼으면서."

- 진짜 용건 없으면 끊겠습니다.

"에이 진짜 쪼잔하네, 키스도 한 사인데. 아니 키스까진 아니지. 뽀뽀지 뽀뽀. 아무튼..."

- 김종인 씨!

종인이 말하는데 경수가 중간에 급하게 말을 끊었다. 전화 너머로 꽤 당황한 도경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히려 그 반응에 종인은 좋았다. 왠지 경수가 부끄러워하는 것 같아서.

종인은 자신이 변태 같았다. 그래서 한 편으로는 어이가 없었다. 내가 진짜 게이라고?





*





"김종인?"

종인은 준면과 오랜만에 점심을 먹으려고 회사를 나섰다. 먼저 식당에 가 있으라는 준면의 말에 그렇게 하려고 길을 걷는데 익숙한 듯 낯선 목소리가 종인의 발걸음을 잡았다.

"맞지? 김종인."

그러니까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주현이었다. 


"어?"

"이런 데서 보네. 오랜만이다. 종인아."

종인은 잘 나지 않는 주현의 기억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종인이 고등학교 2학년일 무렵 사귄 처음이자 마지막 여자친구였다. 

주현은 종인보다 한 살 연상이었는데 못생기지도 않았지만 그리 예쁜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더더욱 학교 일엔 매사 무관심한 종인이 주현을 알 리가 없었다. 사실 종인은 주현과 달리 인기가 많았다. 남학생들은 종인을 보고 기생오래비 같다고 했지만 그건 칭찬이었다. 남자애들이 잘생긴 친구에게 붙이는 호칭이 거기서 거기였는데 주로 기생오래비 라고 했다. 하지만 종인은 그것조차 몰랐다. 맨날 학교 어떻게 하면 안 갈 수 있는지나 고민하던 종인에게 그깟 인기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매사 무관심했던 덕에 종인은 고등학교 2학년 다니는 내내 여자친구를 만들지 않았다. 인기야 많았지만 종인에겐 은근 흘러나오는 포스도 있었기에 종인에게 용기 내어 고백하는 여학생들도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주현이 종인에게 고백했다. 뭐든 지루해 하던 종인에게 주현의 고백은 새로운 이벤트였다. 그래서 받아들였다. 주현에게 딱히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종인은 주현과 사귄 후에도 여전히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주현에게도. 하지만 종인이 무관심 한 만큼 종인과 주현을 둘러싼 소문은 무성해졌다. 한 번도 여자친구가 없었던 종인에게 첫 여자친구가 생긴 것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궁금증이 퍼뜨려낸 소문은 아직 19살 소녀인 주현이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주현은 전학을 갔다. 종인을 떠났다.


류주현이 김종인한테 몸 대줬다며?

김종인이 뭐가 부족해서 류주현 만나겠어. 걔보다 더 예쁜 애들 많은데. 그럼 이유 딱 하나지.



종인은 주현이 왜 전학을 간지 몰랐다. 어쨌든 주현과의 연락은 끊겼고 그로 인한 헤어짐은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졸업을 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주현이 소식 없이 사라진 이유를 들었었다. 여자친구이긴 했지만 손 한 번 안 잡아 본 주현과 그런 소문이 돌았었다니, 종인은 적잖이 충격을 받았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미 지나간 일이고 그런 일에 신경 쓸 김종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주현은 자신과 다르다는 걸 알지 못했다.



"잘 지냈어?"

"별로, 나 전학 가고 넌 연락 한 번 없더라. 난 아직도 네가 나랑 왜 사귄 지 모르겠어."

"그냥..."

이렇게나 정직한 대답이 또 없었다. 주현과 사귄 이유? 그런 거 없었다. '그냥' 이었다. 고백을 받았으니까. 그냥. 그래서 주현이 떠났을 때도 연락 한 번 하지 않았다.


"넌 여전하네. 난 어때 보여?"

"글쎄..."

"내가 조금이라도 불쌍하면 나 한 번만 도와줘, 김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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