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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한위스키 16

Kai x D.o.

카디 독한위스키 16

W. 율이



2010. 7월

소년이 떠올린 그 날은 몹시 더운 날이었다. 소년은 교실 안이 마치 땡볕 아래의 공사장처럼 느껴졌다. 장마가 끝나지 않아 어제오늘 계속 비가 내리는데도 날은 시원하지 않았다. 

소년의 학교는 복장검사를 엄격히 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년은 넥타이를 풀어헤쳤다. 그러면 조금 멋있어 보이는 것 같아서 누구나 다 그렇게 했다. 그랬지만 여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건 몇몇 잘생긴 남학생들일 뿐이었다. 소년은 첫인상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순둥순둥하게 생기긴 했지만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편도 아니었다. 소년은 2학년 5반의 부반장이었다. 그나마 그 자리가 소년을 돋보이게 만들어줬던 계기였다. 

소년은 말을 잘했다. 친구들은 소년을 개그맨 같다며 좋아했다. 친구들의 그 웃음소리가 소년이 자신의 장점을 찾게 만들었다. 어느덧 소년은 인기가 많아져 있었다. 소년의 노란색 명찰에 적힌 변 백 현 석 자는 이 학교의 전교생이 다 알 만큼, 소년은 성장해있었다.


백현은 무엇이든 간에 호기심이 많았다. 승부욕도 강했다. 한 번 호기심 가진 것은 끝을 봐야 했고, 도통 쉽게 시작할 수 없는 일도 끝까지 파고들었다. 이길 수 없는 게임도 이기게 만들었으며, 고3 끝물에 공부에 눈을 뜬 백현은 선생님도 친구들도 네 성적으론 안 된다며 만류했던 수도권의 상위권 대학에도 입학했다. 생긴 건 꼭 순둥순둥해서 아무것도 못 할 것 같더니 또 성격은 생긴 거랑 반대로 학창시절 담배 좀 피우며 놀아봤을 것 같다. 그런 놈이 일류 대학에 입학했다고 이 동네 자랑이란다. 

백현이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는 정말 안 해본 것 없을 정도로 많이 놀았다. 카지노 가서 돈도 좀 만져봤고, 그게 지루해지면 여자를 사귀었고, 섹스하고, 헤어지고, 또 만나고. 그것도 좀 지루해지면 친구들이랑 클럽 가서 데낄라나 마셔라 부어라, 그리고 결국엔 또 섹스하고. 좋은 대학 간 놈들이 더 한다더니 백현을 보면 딱 그 꼴이라고 손가락질받기도 했다. 어쨌거나 백현은 그런데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 신나게 놀아재끼느라. 그래도 딱 하나 안 한 게 있다면 담배였다. 친구들 전부 담배 피우러 나가는 시간이면 꼭 백현만 그 자리에서 빠졌다. 백현도 시도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속이 캑캑대고 맛도 없어서 그 뒤로 입에 대지 않았던 것뿐이다. 

그렇게 마셔라 부어라 놀아놓고 졸업시즌이 되어가니 이젠 다시 공부가 재미있어졌다며 또 이것도 죽어라 했다. 그래서 친구들은 백현을 저 또라이 새끼라고 칭했다. 군대는 면제를 받아 가지 않았다. 11살에 부모님을 두 분 다 잃어 고아가 된 백현에게 남은 가족이라곤 백현을 그나마 불쌍하다며 보살펴 준 큰이모와 큰이모부뿐이었다. 백현의 큰이모는 자녀가 없었다. 이모네 부부는 아기를 무척 갖고 싶어 했으나 이모든 이모부든 한쪽의 문제 때문에 임신을 할 수 없었던 것이 백현에겐 행운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백현을 이렇게까지 보살펴 주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백현은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모네 부부에겐 미안했지만 백현의 상황은 그랬다. 그래서 백현이 수도권 대학에 입학했을 때 큰이모네 부부가 전폭적인 지원을 해줬다. 학교에서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 대상으로 장학금을 지원해 준 것도 백현에겐 도움이 되었지만 그래도 백현이 돈을 벌기 전까지는 큰이모네 부부가 백현을 지원해줬기 때문에 놀기도 놀고 공부도 하면서 이렇게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백현아, 네 이모부 계신 회사에 지원해 볼 생각 없니? 그러면 이모부가 밀어줄 수도 있고..."

백현이 대학 졸업을 앞두었을 때 큰이모가 백현에게 제안했다. 하지만 백현은 웃으면서 아뇨, 제힘으로 해볼게요. 했다. 그렇게 작은 회사에 가선 더 나은 삶을 살 수 없어요. 물론 뒷말은 하지 않았다. 아무리 입방정 떨기 좋아하는 백현이라지만 그가 말을 잘한다고 했던 것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지 않을 줄 알기 때문이기도 했다.



백현에게 있어 종인은 갑자기 앞길을 가로막은 굴러온 돌이었다. 입사 시기도 백현이 1년 빠른데 어디서 낙하산 타고 뚝 떨어진 김종인이란 어린놈이 갑자기 마케팅부 전체 팀장이란다. 백현은 이 회사 어떻게 돌아가려고 그러나 했다. 알고 보니 회장님의 둘째 아들 이란다. 그래서 앞에서 아부도 좀 떨고 싱긋싱긋 웃다 보니 그게 또 정이 들었는지 잘 지내곤 했다. 

도경수에게는 정말로 사과하려고 연락했다. 그러다 보니 도경수가 조금 궁금해졌다. 어째서 백현과 동갑임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어른스러운 건지. 그래서 경수한테 친구 하자고 한 거다. 다른 의도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백현의 호기심을 자극한 사람이 도경수였을 뿐이다.



"그런데 주임님, 김팀장님은 왜 오늘 안 나오셨을까요? 김팀장님 이렇게 안 나온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정말 그 소문처럼 위에서 기밀 작전이라도 시킨 걸까요, 아니면 그냥 회장님 아들이라고 무단결근해도 봐주시는 걸까요...?"

"글쎄요, 무슨 사정이 있겠죠?"

백현이 언제나처럼 특유의 강아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자, 백현에게 조잘조잘 말을 걸었던 사원 하나도 그렇겠죠? 하며 멋쩍게 웃었다. 





*





종인이 회사에 왔다 간 후론 더 이상 연락이 없었다. 경수가 담당자 넘기겠다고 말했지만 벌써 한 부서의 팀장이 되고, 이 만큼 진행된 과정에서 쉽게 담당자를 교체할 순 없었다. 경수도 알고 있었고 그냥 홧김에 한 말이다. 그땐 정말 김종인 안 보고 싶었지만 또 나흘간이나 김종인에게 연락이 없으니 은근 괘씸했다. 도경수가 뭐가 아쉬워서 김종인의 연락을 기다린 건 아니다. 그냥, 정말로 괘씸했던 것뿐이다. '괘씸하다' 이 단어가 아니면 김종인에 대한 경수의 마음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나는 너 안 볼 거라고도 말하고 연락도 안 할 거지만 막상 너한테 연락이 안 오니까 괘씸해!

경수는 이렇게 생각하는 어린애가 된 것 같았다. 아무런 논리도 없이 그냥 나는 그렇게 할 거지만 너는 그러면 안 돼! 라고 우겨대는 어린애. 이게 다 김종인 때문이다. 이런 게 스톡홀롬 증후군이라고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도경수가 이런 일로 골머리 때릴 줄은 누가 알았겠냔 말이다.


경수가 집에서 딸기나 집어먹으며 멍때리고 있는데 띵동 하고 초인종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택배인가? 시킨 것이 없는데, 어머니가 보낸 건가? 하고 인터폰을 확인했을 때 경수는 정말로 놀라 자빠지는 줄 알았다. 

김종인이었다.


경수의 집이라면 가르쳐 준 적도 없고 데리고 온 적도 없었다.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건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조금은 반가운 마음도 반 있었다. 경수가 인터폰에 대고 누구세요? 하자 김종인이 벌써 얼굴 까먹었냐? 했다.




"우리 집은 또 어떻게 안 거야? 스토커야?"

경수가 그렇게 물으며 눈을 동그랗게 뜨자 종인이 맑게 웃으면서 사실은 그제 어디 들렀다가 집에 가는데 낯익은 뒤통수가 있어서 봤더니 차 없이 걸어서 퇴근하는 도경수였더라 하는 거였다.

"그래서 스토킹했냐?"

"그냥, 보고 싶어서 따라가다 보니까 여기까지 따라왔더라. 나도 놀랐어. 그래서 바로 돌아갔는데..." 

"그게 스토킹이야. 무서운 놈."

"··· 미안."


경수가 거실로 걸어 들어가자 종인이 따라 들어오며 고급스러운 광택이 도는 종이 가방 하나를 경수에게 내밀었다. 경수가 뭐? 하고 쳐다보자 종인이 그때 정장, 두고 갔잖아. 하고 나직이 대답했다.


경수가 곱게 개어진 양복을 꺼내 들었을 때 알아챈 거지만 그 양복은 그때 두고 간 그것이 아니었다. 

"세탁소에 맡겨봤는데 완전히 안 빨린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네 사이즈에 맞춰서 새로 한 거야."

"··· 네가 왜?"

"꼭 그때 토 묻은 거 때문이 아니어도, 그냥 뭐 하나 선물하고 싶었어."

"..."

"다른 사람이 듣고 있는데 홧김에 그렇게 말한 건... 진짜 미안해. 이제 안 그럴게."

"..."

"그러니까 어디 도망가지만 마."


나 못 도망가, 김종인.





김종인이 배고프다고 해서 경수가 토마토 스파게티를 만들었다. 그냥 면 삶아서 소스에 비비기만 하면 끝인 토마토 스파게티였지만 종인은 맛있다며 잘 먹었다. 그러면서 다음엔 자기가 프렌치토스트를 구워준다느니 하며 입가에 토마토소스를 잘도 묻히고 먹었다. 

우습게도 김종인이 선물 들고 찾아와서 사과했다고 경수의 화가 다 누그러진 듯했다. 도경수 저도 제 자신이 이렇게 속물스러운 사람이었나 싶어서 실망했다. 어쩌면 도경수가 속물스러운게 아니라 김종인이어서 풀린 걸지도 모른다.


"근데 나 안 보고 싶었어?"

"내가 안 보겠다고 했는데 보고 싶었으면 이상한 거 아니야?"

경수는 밉게 대답했지만 사실 왜 연락이 안 오나 좀 초조했어. 하고 말하기도 창피해서 그냥 그렇게 대답했다. 



"나는 앞으로도 도경수 계속 보고 싶고, 안고 싶고, 키스하고 싶은데 어떡하지..."

"미친놈, 꺼져."

"우리 키스까지 했는데 거의 사귀는 사이 아니야?"

"난 남자랑 안 사귀어."

"그럼 나랑 엔조이만 하겠다는 뜻이야, 그거?"

"미친."

"나는 네가 나한테 마음도 줬으면 좋겠어."

"몸도 안 줄 거야."


경수의 대답에 종인이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는 뭐냐며, 결국 너는 나한테 몸도 마음도 다 주게 될 거야. 라고 말하는 듯, 그렇게 종인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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