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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한위스키 24

Kai x D.o.

카디 독한위스키 24

W. 율이



- 누구세요?

주현이 건 전화 너머에서 울린 목소리는 도경수의 것이 아니었다. 주현에겐 도경수보다 더 익숙한 목소리를 가진 김종인이었다.





*





"누구야."




경수가 종인을 용서한 듯 보여서, 종인은 한가하게 경수와 티비나 보며 앉아있었다. 그러다가 도경수가 지루하다며 제 방에 들어가 버린 것이다. 저렇게 귀엽고 짠한 생명체들이 나오는 동물농장 재방송이 어떻게 지루하다고 느낄 수 있는지 종인으로썬 이해되지 않았지만, 아무튼 도경수는 종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 넌 동물농장 보면서도 우냐?


도경수가 수필을 읽는 게 더 재미있겠다며 방으로 들어가고 종인은 혼자 남았는데, 경수의 휴대폰이 종인의 발밑에 떨어져 있어서 그에 종인은 잠금화면을 풀어보려고 애쓰는 것에 또 쓸데없이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를 냉큼 받아버린 것이다. 



- 어... 이거 도경수 씨 전화번호 맞지?

"누구냐고."

어쨌든 전화 너머의 목소리가 여성이었다는 점은 종인이 적대적인 말투를 감추지 못하게끔 만들었다. 도경수가 완전히 게이인지 아닌지도 확실치 않으니 경계해야 할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탓이다. 

이 여자는 누구지? 길거리에서 꽤 귀엽고 뽀얗게 생긴 도경수의 번호를 낚아채 간 여자일까? 도경수는 그걸 또 고분고분 줬단 말이야? 이 나쁜 놈!

- 나 주현이야, 종인아.

하지만 저 너머에서 돌아온 대답은 조금 의외였다.





*





- 꽃 보러 가자. 


종인이 경수에게 한가하게 꽃축제나 가자며 제안한 것은 이미 5월이 다 끝나갈 때쯤이었다. 경수는 꽃 같은 거 왜 보러 다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축에 속했다. 그냥 볼 때만 잠깐 예쁜 거지 꽃을 본다고 해서 나한테 이득이 되는 것도 아니고, 또 뭔가 스포츠처럼 즐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비슷한 예로 불꽃놀이 같은 것을 보러 도대체 왜 사람들이 떼 지어서 한강 공원에나 가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집에서 맥주나 마시며 티비로 보는 것이 더 유익할 것 같다. 애초에 티비로도 그런 광경 보는 것을 즐기진 않았지만. 게다가 꽃은 거리만 나가도 폈다. 아파트 입구에 핀 철쭉부터 봄에는 근처 공원에만 가도 개나리 같은 것이 여럿 피어있다. 봄에는 꽃의 쌍 기역자도 꺼내지 않더니 입하(立夏)가 지나고서야 갑자기 꽃을 보러 가잔다. 정말이지 김종인의 사고방식은 이해할 수 없다.



며칠 전에는 류주현과 밥을 먹었다. 남의 전화를 마음대로 받은 김종인이 대뜸 뛰쳐와서 '너 류주현이랑 어떻게 알아?!' 하고 소리 질렀으나 경수는 자세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 여자가 성폭행 당하려던 걸 구해줬어. 라고 하기에는 먼저 류주현과 이 얘길 김종인에게 해도 되는지 상의하고 해야 할 것 같았다. 도경수에게 예의란 그런 것이다. 혹시라도 류주현 만날 생각하지 말라며 으름장을 놓는 김종인을 무시하고 월요일 점심에 남는 시간을 이용해 류주현과 만났다. 밥은 주현이 사겠다고 했지만 스타벅스에서 최저시급 받으며 일 할 주현에게 얻어먹는 것이 그리 달갑지 않아서 계산은 따로 했다. 경수가 함께 계산했으면 더 마음이 편했겠지만 주현이 사주지 못한다면 제 밥값은 제가 내겠다며 거듭 강조해서 깔끔하게 더치페이 한 것이다. 

경수가 주현과 편하게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주현이 경수에게 별다른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게다가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주현이 종인의 전 여자친구였다는 점은 경수에게도 굉장히 흥미로워서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6월 첫째 주 토요일이 되고서야 경수는 종인에게 이끌려 어쩔 수 없이 한가하게 꽃이나 구경하러 온 것이다. 사실 경수는 또다시 김종인과 사람 많은 곳을 가야 하냐며 많은 고민을 거쳤다. 한 번 김종인과의 어이없는 스캔들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또 종인과 이런 곳을 나돌아다니는 짓은 꽤 위험하다. 그래서 경수는 이곳에 오기 전 종인에게 몇 번이고 저번 같은 일은 용서하지 않겠다며 주의했다. 김종인은 정말 말조심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아무래도 김종인은 경수와 관련된 일이면 아무 말이나 생각한 대로 내뱉는 경향이 있는 듯싶었다. 정말 김종인은 도경수와 성격 하나라도 똑같은 점이 없다.


종인이 6월 둘째 주까지 열리는 꽃 축제를 찾았다며 휴대폰 액정을 경수에게 들이밀었을 때조차 경수는 심드렁했다. 

- 백만 송이 장미 축제? 부천까지 가서 이런 게 왜 보고 싶은데?

- 당연한 걸 물어? 예쁘잖아!

당연한 것? 예쁘면 보러 가야 하나... 그게 왜 당연한 거야. 경수는 속으로 투덜댔지만, 딱히 입 밖으론 내진 않았다. 김종인은 어쨌든 감수성이 풍부하니까. 슬픈 영화를 봐도 눈물 따위 나오지 않는 도경수와는 다르니까, 그래서 이해하기로 했다. 그리고 사실 이 세상에는 김종인 같은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을 경수도 잘 안다.


종인이 경수에게 사진을 찍어달라며 카메라를 내밀었다. 김종인은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모르면서 미러리스 카메라를 샀다. 고작 오늘만을 위해서! 아무리 돈이 많다지만 이런 돈 지랄이 또 없다. 하긴 저나 김종인에겐 이런 카메라 얼마 안 하겠지만 경수는 그게 그리도 아까웠다. 오늘 사용하고 아마 벽장 속에 처박혀서 몇 년은 꺼내지 않을 게 분명하다. ISO나 셔터속도, 화이트밸런스와 색감? 정말 이런 거 하나도 모른다. 그저 모든 것을 자동모드로 놓은 채 셔터만 누르는 것뿐이다. 김종인은 그럴 거면 비싼 카메라를 왜 샀는지 모르겠다. 휴대폰으로 찍으면 될 것이지. 

종인이 경수의 사진도 몇 장 찍어주겠다고 했으나 경수는 거절했다. 경수는 사진 찍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이쯤되면 종인은 경수가 대체 뭘 좋아하는지 알 수 없을 지경에 도달했을 것이다. 



김종인은 은근히 말을 잘 들었다. 큰 소리로 얘기하지도 않고, 바깥에서 애정표현을 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또 한 번의 실수로 도경수가 정말 종인을 떠나버리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에서 나온 행동일 것이다. 그럴 땐 김종인이 또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도경수는 제가 정말로 미친 줄 알았다. 


"꽃이 예뻐서 보러 가는 거라더니, 화보 찍으러 왔냐?"

경수는 카메라를 드는 순간마다 종인의 전속 사진 촬영기사가 된 것 같았다. 인정하긴 싫지만 김종인이 예쁘게 핀 장미나 조형물들을 배경으로 등지고 포즈를 취했을 땐 정말 화보가 따로 없다고 생각했다.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잘생긴 얼굴이며, 자존심 상하게도 도경수와는 달리 긴 기럭지를 가진 것에 김종인은 부모님께 감사히 여겨야 한다.





*





찬열은 베란다 창문에 기대서 담배를 피웠다. 창문 바깥으로 흩날리는 담배 연기가 바람을 타고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왔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준면과 교제하기 시작하면서 담배를 끊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다시 피기 시작했다. 아마 그건 그와 헤어지고부터 일 것이다. 항상 헤어질 때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그에게 완전히 타격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2년을 넘도록 함께 한 사람이다. 아프지 않으면 이상한 것이다. 가슴 한 켠이 텅 빈 것 같지 않으면 이상한 것이다. 찬열은 그 비탄을 담배 피우는 것으로 호소하기로 했다.

김종인과 도경수도 언젠가 헤어질 것이 분명하다. 우리나라의 사회적 시선은 아직 동성애자들에게 곱지 않다. 그러니까 그들도 결국은 헤어질 것이다. 찬열이 애인들과 수없이 헤어진 것처럼. 


그리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서 떠날 것이다. 찬열이 항상 그래왔던 것 처럼. 



가끔씩 준면에게 연락이 왔다. 얼굴을 보거나 전화는 받지 않았지만 문자나 카톡이 올 때마다 답장은 해 줬다. 찬열은 그게 떠나간 사람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찬열의 전 남자친구는 찌질했다. 전 남자친구들이 다 그렇듯이 그도 똑같았다. 뭐해? 부터 시작해서 나 아직 너 못 잊었어. 까지. 정말 찌질해서 못 봐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 준면의 문자를 보고 있으면 또 우울해지는 것이었다. 

찬열은 항상 웃었다. 살면서 행복한 일이 많아서 웃고 다닌 것이기도 했지만, 사실 그렇게 행복하지 않아도 웃고 다녔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속설도 있다. 더군다나 잘생긴 찬열이 웃고 다니면, 정말로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난다. 찬열이 웃으면 전염되듯이 다른 사람들도 웃었다. 누군가는 그를 해피 바이러스라고 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열이 준면과 헤어지고부터는 조금씩 웃음을 잃어가는 것을 느꼈다. 아, 해피 바이러스라는 별명도 김준면이 지어준 거였지. 찬열의 일상 속에 김준면은 여기저기 침범해 있었다. 김준면을 많이 사랑하긴 했었구나. 싶을 정도로.



찬열은 아직 김준면을 다 잊지 못했다. 누가 물어도 소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나는 아직 전 남자친구를 다 잊지 못했다고. 하지만 그와 다시 시작할 생각은 없다. 누누이 말해왔던 것이지만, 찬열은 한 번 헤어진 사람과는 다시 만나지 않는다. 그래서 찬열은 새로운 만남을 시도했다. 물론 첫 만남은 언제나 우연이다. 

찬열이 경수와 함께 간 닭갈비 집에서 백현을 처음 마주했을 때, 이 사람과 한번 잘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찬열은 언제나 그랬다. 불같이 이는 사랑과 제 마음에 대한 확신. 아직 마음속 저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김준면은 다시 새로운 사람을 사랑하는 데에 있어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자리가 없다면 또 만들면 된다. 한 번에 여러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다. 아직까지 그런 적은 없지만 찬열은 그럴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언제 또 백현을 만나게 될지는 모르지만, 어쩐지 도경수와 김종인의 곁에 계속 머물면 언젠가 다시 변백현을 마주할 날이 올 것 같았다. 그런 다음 부딪혀보고 안되면 포기하면 된다. 상대방이 자신은 남자에 관심 없다고 하면 깨끗이 포기하고 다시는 보지 않으면 될 일이다. 그것은 찬열이 수 없이 연애할 수 있었던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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