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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한위스키 32

Kai x D.o.

카디 독한위스키 32

W. 율이



"경수야... 형 갔어."

경수가 방 문에 기대어 얼굴을 쓸어내리고 있는데 종인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김준면이 가지 않는다면 도경수라도 옷을 다 챙겨 입고 김종인의 집을 뛰쳐나가려 했다. 그러려고 했으나 준면이 '방해해서 미안, 이따 다시 얘기하자. 할 말 있어.' 하고 현관문을 나가는 소리가 들리길래 그대로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 괜히 나가려고 했다가 김준면이랑 마주치기도 어색하고, 이 관계를, 게다가 섹스 한 판 신나게 하다가 발각된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싶기도 했다. 난 이제 진짜 망했어, 씨발. 아버지한테 불려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렇게.


그리고 종인은 김준면이 나가자마자 현관문 비밀번호를 바꾸는 듯 싶었다. 씨발 이거 어떻게 하는 거야- 하고 낮게 뇌까리면서 무언가 띡띡띡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경수가 제 손으로 방 문을 열고 성큼성큼 종인에게로 다가갔다. 이거 이렇게 하는 거잖아. 오, 그러네?



"형한테는 잘 말할게. 너한테 해 끼치는 일 없을 거야. 형이 알아버린 건... 어쩔 수 없지만 되도록이면 그 선에서 끝나도록 할게."

"..."

"제기랄, 내가 병신이지. 미안..."

종인이 경수를 향해 낮게 읊조렸다. 미안. 이라고. 경수는 생각했다. 이 관계 정말이지 서로 그렇게나 미안한 것이 많노라고. 미안, 미안, 미안. 종인에게서 이 단어를 몇 번이나 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경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종인이 말했다.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도경수."

"··· 응."

경수도 대답했다.





*





사실 상황은 경수와 종인이 생각한 것보다 심각한 문제는 되지 않았다. 준면은 이상한 환희에 취해있었다. 그러니까, 동생이 나와 같은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안식처가 된 것 마냥. 그동안 준면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끙끙대던 일을 이제 종인과 상의할 수도 있다. 준면은 조수석에 놓인 고급 와인 한 병을 응시했다. 저도 모르게 그대로 들고 나와버렸네. 나중에 종인이랑 같이 한 잔 하면서 얘기해야지. 그런데 침대에 앉아있던 그 애.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누구더라?





*





8월이 끝나기까지 10일도 채 남지 않은 시점까지 비는 쏟아지고 있었다. 올해의 장마는 유난히 길다. 백현은 창밖을 바라보며 탕비실의 커피 머신을 이용하고 있었다. 회사 탕비실에 커피 머신이 들어선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아직도 백현의 꼰대 상사는 예쁜 여직원이 제 손으로 직접 타주는 믹스커피가 다방 커피같아 좋다고 했지만 백현은 커피 머신이 들어선 이후로 그것을 자주 애용했다. 요즘은 찬열과 만나는 일이 줄어들었다. 그것은 온전히 찬열이 피곤에 지쳐버린 이유 때문이었고, 백현은 그가 휴식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전부터 스멀스멀 백현의 속에 피어오른 생각이었지만, 그는 문득 찬열과 헤어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오롯이 호기심 때문에 한 연애였고, 백현은 찬열과 함께 있으면 즐겁긴 했으나 사랑하는 느낌이 들어 행복하지는 않았고, 끊임없이 대화하고 웃긴 했으나 스킨십하진 않았다. 이윽고 찬열과 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이 무너지자, 마침내 깨달은 것이다. 아, 나는 박찬열이 하는, 또 김종인과 도경수가 하는 게이 연애 따윈 할 수 없구나. 나는 박찬열을 단 한 번도 사랑한 적 없구나- 하고.


그까지 닿았으나 마음의 요동 같은 건 없었다. 애초에 사랑하지 않았는데 있을 리가. 백현은 여전히 느긋하게 커피를 들이켰다. 창밖은 장맛날의 여느때처럼 비가 쏟아지고 있다. 백현이 헤어지자고 말한다면 찬열의 마음도 저것과 같이 쏟아져내릴까. 박찬열이 그만큼 날 사랑했던가. 모르겠다. 왤까. 왜 그것조차 가늠하지 못하는 걸까. 이윽고 그 답 또한 수면 위로 선명히 떠올랐다. 박찬열이 날 대할 때 어떻게 대했는지, 날 사랑하는 눈빛이었는지, 백현이 그동안 찬열을 단 한 번도 관심 가지고 들여다본 적 없었다는 것을.





*





종인은 경수와 최대한 바깥에서 만남을 가지는 것을 자제하기로 했다. 종인으로써는 도경수와 여기도 가고 싶고, 또 저기도 가고 싶은데 이제는 더 이상 그러지 못한다는 것이 비통했으나,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도경수의 아버지 앞에 찾아가서 무릎이라도 꿇어야 하나. 아들을 저에게 주십시오. 하고? 참 잘도 주겠다. 종인이 실없는 소리를 하자 도경수가 한 말이었다. 어쨌거나 이제는 협업 건도 잘 마무리돼서 일을 핑계로도 만날 수 없게 되었는데 상황이 참 애석하게 되었다. 


"김종인."

종인이 비 오는 창밖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아버지가 종인을 불렀다.

"내 말 듣고는 있는 게냐?"

참, 아버지한테 불려왔었지. 하여간 도경수 생각은 한 번 하면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종인이 아... 하자 아버지가 다시 한 번 말했다.

"계약도 유리한 조건으로 성립하고, 일도 잘 마무리했고. 칭찬을 안 할 수가 없어. 처음부터 이렇게 잘 했으면 얼마나 좋아."

"예."

종인이 그토록 듣고 싶어 했던 칭찬이다.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도경수, 너는 나에게 참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을.


"그래, D그룹은 어떻게 됐나?"

"예?"

"도경수군 말이야. 요즘 아주 붙어다닌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야. 어디까지 진행되었느냐고."

어디까지 진행되었냐고. 그렇지, 도경수는 원래 그러려고 만난 사람이었지. 그런데 그런 소문까지 났었던가. 그러면 안되는데. 도경수가 곤란해 할텐데. 종인이 그 생각을 하며 이맛살을 약간 찌푸렸다.

"왜, 잘 안되었나?"

"··· 아뇨, 걱정안하셔도 돼요."

"그래. 어쨌든 네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을 다 내려놓는 건 도경수 군이 되어야 하지 네가 되면 안된다는 것 알고 있지?"

"··· 예."



종인은 회장실을 나오면서도 아버지의 말이 계속 귓가에 멤도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을 내려놓는 건 도경수군이 되어야 해. 네가 되면 안 돼. 언젠가 꿈에서 도경수의 형상을 한 작은 악마가 내게 속삭였던 적 있었지. 내가 너한테 미친 게 아니라, 네가 나한테 미쳐버렸는데 어떡해? 이윽고 꿈속의 종인은 그 죄책감을 모두 지워버렸다. 밟고, 뭉개뜨려 버렸다. 나를 괴롭히지 마. 그따위 조건에 나를 가두지 마.



"오랜만에 위스키바에서 한 잔 하자."

복도를 걸어가는 종인을 준면이 붙잡았다. 


"도경수 군 이야기도 하고, 내 이야기도 하고."





*





그러니까, 잠시 우리는 종인이 준면에게 경수와의 관계를 들킨 그 다음날로 돌아가 보자. 

준면이 종인을 부른 것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월요일의 점심시간이었다. 직장인들이 국밥집에서 국밥에 밥 한 그릇 말아 분주하게 해치우고는 느긋하게 커피 한 잔 한다거나, 양손에 샌드위치와 커피를 사 들고 회사로 바삐 향하거나 하는 그 시간 말이다. 종인은 마시지도 않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준면이 마음대로 두 잔 주문한 것에 있어서 조금 짜증 났다. 도경수도 아는 이 사소한 취향 따위도 모르는 형제지간을 떠올리며 말이다. 종인이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차가운 성질과 여름철의 뜨끈한 공기가 만나 생기는 수증기 같은 것이나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준면이 입을 열었다. 

"나 사실 남자랑 2년 동안 연애하다가 넉 달 전에 헤어졌다."

"어?"

종인이 눈을 크게 뜨고 준면을 쳐다봤다. 준면은 느긋하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주욱 빨아들였다.


"무슨 말이야?"

"나도 너랑 네 애인이랑 똑같은 사람이라고."

"그럼 그때 헤어진 사람이 남자였어?"

"어. 나도 놀랐다. 너도 그런 쪽일 줄은 몰랐거든."

"아... 다행이다."

"뭐가?"

종인이 안심한 듯 가슴을 쓸어내리자 준면이 물었다.


"도경수 아버지가 나랑 도경수 관계 약간 눈치챘다고 했거든. 혹시라도 형이 불어서 도경수 잘못되면 어쩌나 했어."

"그 애가 도경수였어? D그룹?"

"어?"

"그 게이설 논란 사진에 같이 있던 사람이 너였냐?"

"어..."

"그게 사실일 줄은 몰랐네. 어쩐지 네 애인 낯이 익었었거든. 그렇다고 D그룹 도경수일 줄은..."

준면이 약간은 들뜬 듯 말했다.

"그런데 이런 거 말하면 전 애인한테 예의가 아니어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너무 우연이 우연이 아닐 수가 없어서 말한다. 내가 사귀었다던 그 사람, 도경수가 다니는 D전자에 다니거든."

종인은 준면의 말을 듣자마자 떠올렸다. 박찬열을. 남들과는 연애 취향이 조금 다르다는 박찬열을. 그리고 도경수를 좋아하는 건 아니라던 박찬열을.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던 박찬열을.


"설마 박찬열 씨야?"

"어? 네가 어떻게 알아?"

"박찬열이 내가 도경수랑 사귀는 거 눈치채고 나한테 그랬거든. 사실 자기는 남들과는 다른 연애 취향을 가지고 있다고."





*





찬열은 전화 너머로 울린 백현의 목소리에 아무런 미동 없이 서있었다.

- 헤어지자.

간결한 내용이었다. 왜? 왜, 너까지 그래, 백현아. 하긴, 그러고 보면 변백현과 함께 있을 때에도 변백현은 단 한 번도 찬열에게 관심 가져준 적 없었다. 함께 대화하고, 즐겁게 웃었으면서도 단 한 번도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쳐다봐 준 적 없었다. 백현이 호기심으로 저와 사귀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마음을 주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애초에 남자가 조금이라도 취향이 아니라면 사귀자는 말에 응할 것도 없었으니까. 어쨌든 호기심이었다 해도 사귀자는 말에 응했으니까. 백현이 이쪽이 처음이라는 것을 알고 스킨십도 자제했다. 최대한 천천히 하려고 노력했다. 그가 마음을 완전히 열 때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그 기다림의 대가는 가차없었다. 헤어지자고? 내가 느린 걸음에 맞춰줬던 대가가 고작 이거라고.


그럴 수 있지. 찬열은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토록 피곤에 지친 찬열이 넓게 포용할 만한 상황이 안되었다. 하지만 어쩌겠어. 이별 통보를 받았다. 그것에 답해야 한다. 그래, 그러자. 이미 마음이 떠난 상대에게 붙들려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찬열도 잘 안다. 

그래서 대답했다.

"그래, 그러자."


그리고 이미 다른 것에 치일만큼 치여서, 떠난다는 사람 붙잡고 늘어질 힘조차 남아있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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