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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한위스키 37

Kai x D.o.

카디 독한위스키 37

W. 율이



토요일의 나른한 오후였다. 종인이 창밖을 바라봤다. 도경수는 언제 오지. 도회장의 감시 때문에 예전처럼 종인이 경수의 집에 매번 들락날락할 수는 없게 되어서 이제는 경수가 매주 주말마다 종인의 집에 오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토요일 출근을 했다면 지금쯤 퇴근해서 이미 도착했어야 할 시간이었는데도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박찬열을 만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경수가 찬열을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보살피듯 만나기 시작한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간다. 종인이 나름 추측에 잠겨있는데 누군가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도경수다!


"박찬열 보고 왔어?"

"응, 말 안 해서 미안. 원래 다음 주에 보려고 했는데 회사 근처라고 그래서 잠시 만났어."

경수가 겉옷을 얌전히 옷걸이에 걸며 말했다.


"박찬열은 어때? 잘 지내? 괜찮대?"

"어, 예전 같아. 예전처럼 똑같이 웃고, 말하고... 기타 배운지도 벌써 한 달 다 되어간대."

"다행이다. 그럼 다음에 박찬열한테 기타 쳐 달라고 하자. 너는 노래하고, 나는 춤추고."

종인이 즐거운 듯 큭큭 웃으며 말했다.

"춤? 춤출 줄도 알아?"

종인의 말에 경수가 의외라는 듯 종인을 쳐다봤다.

"그냥 어릴 때 조금 배웠어. 나 춤 잘 춰. 다음에 보여줄게. 아버지는 싫어하셔서 관뒀지만."




저녁으로는 종인이 구워준 프렌치토스트를 먹었다. 경수는 프렌치토스트의 마지막 조각을 입에 넣으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김종인, 요리라고는 라면이랑 토스트밖에 만들 줄 모르는 게 확실하다. 다음엔 김치찌개 끓이는 법이라도 알려줘야지. 


"이건 좀 지난 이야긴데."

"응?"

"저번에 만났을 때 박찬열 씨가 너한테 잘해주라고 그랬다."

"역시 박찬열 씨. 좋은 사람일 줄 알았어. 내 눈은 정확해."

"예전에 너 찬열 씨 싫어했잖아."

"어떻게 알았어?"

"그렇게 노려보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야?"

"아무튼 지금은 안 싫어해."





*





찬열은 새벽 라디오를 즐겨듣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왜 듣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좋은 음악, 낯선 이들의 사연, 그리고 그들을 위로하는 한 마디. 라디오를 다 듣고 나면 새로이 장만한 작은 노트 한 권에 조그맣게 감상평을 써 내려갔다. 부질없는 짓일지도 모르지만, 나중에 누군가 보게 된다면 그를 한 번쯤 추억해줄 매개체가 될 것이다. 더 이상 항우울제는 먹지 않았다. 병원에도 가지 않았다. 노트 한 권에 감상평을 쓰는 것보다 더 부질없는 짓이란 걸 깨달은 후부터 하지 않은 것들이다. 정직을 당한지도, 기타를 배우기 시작한 지도 한 달이 되었다. 시간은 참 빠르게 흘러간다. 아니, 사실은 더 빠르게 흘러갔으면 좋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창문이 젖혀진 창가에서 차가운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갈색 커튼이 휘날리자 새까맣게 물든 밤하늘이 보였다. 아득히 먼 하늘에서 별똥별이 땅으로 추락하는 것을 보았다. 찬열은 생각했다. 누군가 저 별똥별을 보고 소원을 빈다면, 그 소원은 항상 행복하게 해주세요. 였으면 좋겠다고. 더 이상 우울 따위의 정신질환이 그들을 죄여 매지 못하도록.





*





경수는 문득 종인이 커플 아이템을 가지고 싶다고 말한 것을 떠올렸다. 커플 티나 신발 같은 티 나는 건 안되더라도, 조그마한 악세사리나 지갑 같은 것은 괜찮지 않을까 하고 제안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지금 입고 있는 정장도 김종인이 선물한 것이었다. 경수의 화를 풀어주러 집까지 찾아와서, 그냥 뭐 하나 선물하고 싶었다고 말하던 김종인. 경수는 그런 김종인을 떠올렸다. 나도 뭐 하나 선물해 줘야지.





*





깊은 적막 사이, 눈을 뜨니 꿈 속이었다. 아득히 먼 곳에 누군가 서 있었다. 너무 멀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까만 그림자. 이내 그 그림자가 벼랑 밑으로 사라져갔다. 그다음엔 도경수를 보았다. 비에 젖어, 그리고 눈물에 젖어 엉엉 울고 있는 도경수를 보았다. 경수야, 울지 마. 종인이 가까이 다가가려고 했지만, 그대로 등을 돌려 도망치는 도경수를 잡을 수 없었다. 도경수, 가지 마. 나를 떠나지 않는다고 했잖아. 경수야, 어디 가. 가지 마!

끼이이익- 쾅! 바퀴가 거칠게 구르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온다. 치이이익, 아스팔트 위에 뜨겁게 달궈져 피어오르는 연기, 그리고 지면을 차갑게 적시는 피, 피. 종인은 참혹한 교통사고 현장에 서 있었다. 엄마, 엄마? 엄마!!! 고작 열다섯 살이었다.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목격한 것은. 가지 마, 가지 마세요. 어디 가는 거예요. 엄마, 나를 두고 어디 가세요. 

종인이 숨을 거칠게 내쉬며 꿈에서 깨어났을 땐 5시를 조금 넘긴 이른 새벽이었다. 그저 허상일 뿐인 꿈이 너무나도 두려워서 도경수를 찾았다. 도경수, 전화받아. 제발, 제발. 그리고 이윽고 전화 너머로 울리는 나른한 경수의 목소리.

- 여보세요...?

"도경수!"

- ··· 어?

"날 떠나지 않을 거지?"

- 뭐라고?

"너는 나를 떠나지 않을 거지?"

- 왜 그래.

"떠나지 않는다고 말해줘. 제발, 제발. 너는 그렇게 갑자기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말해줘..."

- ··· 김종인, 너 왜 그래.

경수가 말했다. 너 왜 그래. 악몽 꿨어? 김종인, 진정해.





*





찬열이 기타를 배우는 것과, 라디오를 듣는 것 이외에도 최근에 시작하게 된 것이 있다면 목도리를 뜨는 것이었다. 곧 다가올 폭설의 계절을 대비하는 것이다. 학교나 회사를 다닐 때엔 하지 못했던 것들이다. 아버지는 찬열의 방을 지날 때면 여전히 구시렁대는 것을 잊지 않았다. 

- 또 기집애 같은 거나 하고 앉아 있네.


찬열은 오래전 부터 생각했다. 빨리 올겨울의 첫눈을 보고 싶다고. 새하얗게 내려앉을 눈송이들은 아무런 우울도, 죄악도 담지 않았을 것이다. 





*





경수가 주문한 지갑 두 개가 나란히 입고된 것은 우연히도 첫눈이 내리는 날이었다. 200일 선물이라고 나름 준비했던 것이 해외 배송이라며 3일이나 늦어졌다. 그럼에도 김종인은 어린아이처럼 기뻐할 것이다. 경수는 문득 종인의 환한 미소가 얼른 보고 싶었다. 언제부터 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종인의 미소를 갈구했는지는 모르겠다. 미쳤지, 도경수.

경수가 빨리 퇴근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빨리 퇴근해서 종인의 해사한 미소를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김종인, 웃는 것이 참 예쁘다. 그가 기다란 보조개를 드러내고 웃을 때면 세상의 비애 따윈 하나도 모른다는 어린아이 같이 보였다. 아마 종인도 경수의 미소를 보고 그렇게 생각했을까. 도경수의 하트 입술, 김종인이 좋아하는 경수의 모든 부분 중에서도 가장 좋다고 했던 하트 입술. 

경수는 종인을 처음 마주했던 어느 봄날을 떠올렸다. 키가 크고, 연한 갈색빛을 띤 머리칼을 가진 김종인, 네이비색 정장을 입고 있었던 김종인, 멋대로 독한 위스키를 주문했던 김종인, 도경수를 제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던 김종인, 세상에서 가장 싫었던 김종인. 그리고 마침내 경수가 그의 아이 같은 미소를 갈구하게 만든 김종인. 이 모든 것은 김종인이자, 김종인이었다. 한치의 의심도, 흐트러짐도 없는 김종인이었다. 


며칠 전부터는 다시 아버지가 경수를 삼엄히 감시하기 시작했다. 경수가 종인의 집에 드나드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챈 모양이었다. 주말엔 자꾸 어디를 드나드냐며 꼬치꼬치 캐묻는 아버지를 어머니가 제지시켰다. 

- 자꾸 애를 못 믿고 당신은 왜 그래! 경수가 그럴 애야? 

경수는 그날도 집에 돌아가서 혼자 바들바들 떨었다. 김종인, 나 무서워. 하지만 네가 곁에 없는 것도 난 무서워. 그래서 감수했다. 여전히 이 관계가 세상에 들춰지는 것은 무섭다. 아버지가 아는 것이 무섭다. 언젠가는 종인의 곁을 정말로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종인아, 최대한 나는 버틸 거다. 



언젠가 종인과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 내가 도경수를 좋아한 이유랑 똑같은 이유로 도경수도 나를 좋아하게 만들려고 했을 거야.

- 왜 똑같은 이유인데, 싸이코냐?

- 너도 나랑 똑같은 감정 느끼게 하고 싶으니까.

그런데 종인아, 너는 결국 이뤄냈다. 도경수는 김종인을 좋아한다. 우습게도 내가 그렇게 되었다.



그리고 경수는 새하얀 눈송이들이 찬란하게 휘날리는 하늘을 응시했다. 하늘을, 그리고 찬열을, 찬열을, 찬열을.

아득히 높은 옥상 난간에 서 있던 찬열을, 몸이 아래로 쏠리 듯 휘청거리던 찬열을, 마침내 끝없이 곤두박질치는 찬열을, 찬열을.


경수는 눈을 감았다.





*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것은 찬열의 이야기이다.

경수와 종인이 한가하게 연휴를 보냈던 그 일주일간의,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져온 날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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