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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카포(da capo) 19

Kai x D.o.

[카디] 다 카포(da capo) 19

W. 율이



종인은 밤새 기분이 썩 좋지 않은 꿈을 꿨다. 꿈속의 종인은 종인 이외의 그 어떠한 사람도 없는, 아주 삭막한 곳에 서 있었다. 어둠과 빛, 그리고 여린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조차도 없는 곳. 정말로 아무것도,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곳. 그곳에서 종인이 이리저리 사람을 찾아 헤맸지만, 그곳엔 정말로, 그 누구도 없었다. 종인의 곁에는 도경수도, 아버지도, 박찬열도, 그리고 그 누구도 없었다.

그래서 걸었다. 하염없이 걸었다.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걸어도 걸어도 변하지 않는 회색 배경만이 그의 뒤로 펼쳐질 뿐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그곳은 그 어떤 곳보다 안전했고, 평온했고, 조용했다. 종인을 위협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종인은 결코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꿈속의 종인은 기어코 도경수를 찾아냈다. 도경수, 도경수를.

꿈속의 도경수는 종인을 바라보지 않았다. 삭막한 하늘을 내다보던 도경수는 이렇게 말했다.

- 이야기의 끝이 어떨 거라고 생각해?

무슨 이야기? 하지만 종인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리고 꿈속의 도경수는 이어서 말했다.

- 나는 결코 희망 따윈 없다고 생각해. 김종인.

너랑, 나. 이어 조그맣게 움직인 도경수의 입 모양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왜? 우린 이제껏 잘 만나 왔잖아. 너도 나를 좋아한다며! 꿈속의 종인이 그렇게 말하려 했으나, 찰싹 붙은 입술이 떼어지지 않았다. 도경수는 아무런 표정 없이 종인을 바라보다, 등을 돌려 종인에게서 멀어져갔다. 종인이 그의 뒤를 따르려 했으나, 어쩐지 잘 되지 않았다. 도경수! 도경수!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겨우 꿈에서 깨어났을 땐, 이미 꿈의 기억은 다 사라지고 어설프게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무언가 기분 좋지 않은 꿈을 꿨었다고 떠올릴 정도로만.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보니 아직 새벽녘이었다. 옆에서 시끄럽게 고는 아버지의 코골이 소리가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낯선 소음 사이에서, 종인은 경수를 떠올렸다. 그렇게 화를 내면 안 됐었는데··· 도경수, 나는 네가 정말 싫다고 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건 거짓말이었다. 경수가 짐작했던 것처럼. 어쩌면 너를 너무 좋아해서 지금 화내고 있는 거잖아! 하고 말했어야 할 걸 잘못 내뱉은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뒤늦게 후회해 봤자, 아무런 소용 없다는 걸 종인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도경수, 그래도 그건 네가 잘못한 거야. 내 마음 같은 건 하나도 몰라주는 도경수가 잘못한 거라고!




*




미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집으로 돌아왔다. 온몸에 멍과 상처가 가득했지만, 가족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미나에게 아무 일도 없었다고 생각하길 바랐다. 그리고는 저 자신에게까지도 세뇌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에겐 정말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거야. 오늘은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과 만나서 재미있게 놀고, 헤어진 후 집으로 돌아온 거야. 그것뿐이야. 정말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마냥. 하지만 제 생각과는 다르게 떨리는 목소리는 억누를 수 없었다.

미치도록 무섭다고 생각했다. 저를 부순 괴물이 벌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그 일이 저에게 일어났다는 사실을 두려워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모든 것이 제 잘못 같았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그 어떤 것도 입에 담고 싶지 않았다. 더럽다. 문득 저 자신이 더럽다고 느껴졌다. 이건 모두 내 잘못이야. 결국, 이 모든 두려움의 종착지는, 미나가 그 누구에게도 제가 당했던 범죄를 알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후, 명랑했던 김미나의 모습은 말라붙어버린 발목의 핏자국처럼, 누군가에 의해 흔적 없이 지워져 버려 다시는 볼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미나의 비극은 그것이 아닌 또 다른 곳에서 이루어진다. 제가 소중하게 여겼던 사람들에 의해서.




*




경수는 주말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 어기적어기적 부엌을 돌아다녔다. 평소 같았으면 한참을 자고 있었을 시간이었겠지만, 시험 기간이어서 주말에도 아침 일찍 깨곤 했다. 물 한 컵 따라 마시고, 배가 고파서 먹을 거 없나 하고 냉장고를 뒤적거리던 찰나, 외출을 준비하던 어머니가 물었다.

"공부는 잘되어가니?"

"네."

경수가 짧게 대답하자, 어머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뒤에 몇 마디 더 덧붙였다.

"뭐든 열심히 해. 친구 사귀는 것도, 공부하는 것도. 피아노 친다고 공부도 게을리하면 안 되는 거 네가 더 잘 알지?"

"··· 그럼요."

"우리 아들이 항상 잘 해줘서 엄마 아빠는 걱정 안 해. 또 어디 나가더라도 늦게 다니진 말고, 늦을 거면 연락 꼭 하고. 밥은 안 해뒀으니까 네가 해 먹든지 시켜 먹든지 해, 알았지?"

"그럴게요."

"그래, 사랑해 아들."

이내 어머니가 집을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수는 거실 소파에 앉아 배달 어플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요즘은 1인분도 배달해주는 곳이 많아서 좋다. 백현의 집에서 놀 때는 참 배달 많이 시켜먹었었는데 최근엔 그래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뭘 먹지···.


그리고 경수가 시킨 치킨 스테이크 도시락이 도착할 때까지도, 김종인에게서의 연락은 단 한 통도 없었다.




*




그리고 그사이, 종인은 문득 경수에게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사실은 내가 더 잘못한 걸지도 모른다. 도경수는 연애도 처음 하는 거라던데···. 서툰 게 당연한건데 내 진심을 몰라준다고 너무 몰아붙였다. 사실 제가 잘못했다는 건 경수와 싸운 직후부터 자각은 하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지.




*




경수가 백현을 만난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서로 뭐가 그렇게 바빴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와의 만남도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어제와 같은 길로 도서관에 가던 중이었다. 김종인은 연락도 없고, 그렇다고 먼저 연락을 해 보기에는 사실 용기가 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제가 잘못한 게 맞는 것 같다. 하지만 도경수가 뭐가 그렇게 두려웠는지는 모르겠으나, 김종인에게 네 마음을 몰라줘서 미안하다며 먼저 사과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너를 좋아한다고 말한 것도 겨우 어제서야 말한 건데, 먼저 굽히고 들어간다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먼저 사과하고 화해하면 쉽게 풀릴 것을, 김종인 앞에서만 하지 못하고 있었다. 도경수가. 그 도경수가.

그렇게 도경수가 어울리지 않게 온통 김종인을 떠올리고 있을 때쯤, 누군가 경수의 뒤통수를 살짝 미는 것이 느껴졌다. 백현이었다.

"도갱, 도서관?"

어딜 간다고 먼저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11년을 친구로 지내면 이런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인가보다. 하고 생각하며 경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제야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백현이 팔로 경수의 어깨를 두르며 은밀하게 묻는 것이었다.

"너, 저번에 너한테 고백했던 애랑은 어떻게 됐냐?"

백현은 아주 음흉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그는 무척 즐거운 듯 보였다. 하긴, 궁금할 만도 하겠지. 그 이후로 소식 한번 못 들었을 테니까. 그래서 경수가 대답했다.

"사귀어."

그리고 백현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사귀어? 도경수가? 그러면서도 이렇게나 태평하게 그 사실을 고백한다. 정말이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상태로. 하긴, 도경수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래도 약간 충격적이었다. 한 번도 애인 만든 걸 본 적이 없던 도경수에게 첫애인이 생겼다는 점이.

"미친."

"놀랍냐?"

"너 같으면 안 놀라겠냐?"

"······."

"그래서 누군데? 어? 누구냐고오···"

백현이 두른 팔을 좁게 굽히는 걸로 더욱 밀착하며 경수를 몰아붙였다. 하도 귓가에 대고 속삭여서 귀가 간지러울 지경이었다. 그리고 경수는 그가 이런 식으로 장난을 치는 것엔 아주 익숙해져 있었던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을 누군가는 그러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결국 백현은 화가 난 김종인에 의해 내동댕이쳐지고 만다.

"아!"

경수가 다급히 뒤를 돌아봤을 땐, 정말로 얼굴이 붉어져 씩씩대고 있는 김종인을 목격할 수 있었다. 

"야!! 도경수! 너 지금 나랑 싸웠다고 바람피우냐?"

경수는 사실 그때, 종인의 입을 틀어막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백현의 웃음이 터진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백현이 내동댕이쳐진 상태로 자지러지게 웃자, 종인이 그를 홱 노려봤다. 정말로 종인은 백현을 한 대 칠 기세였다.

"너 뭔데, 이 새끼야."

"김종인!"

하지만 백현이 대답하기도 전에, 경수가 그 앞을 막아섰다.

"도경수 너한테 안 물었어. 비켜."

"그만하라고."

"뭐?"

"너 지금 흥분해서 앞뒤 못 가리는 거 같다고. 그러니까 그만해."

"넌 지금 내가 왜 화났는지 몰라서 그래?"

"네가 생각하는 거 아니라고."

"그럼 뭔데?"

"그냥 친구야."

경수의 대답에 종인이 피식 웃었다. 남자 새끼 둘이 아무리 사람이 많이 없다지만 그래도 이 탁 트인 길가에서 잔뜩 밀착해 귀에 바람이나 부는 게 그냥 친구 사이라고? 그건 정말 게이 아니면 못 그래!! 

물론 그건 김종인의 생각일 뿐이었지만.

어쨌든 종인은 제 오해에 심취해 또다시 어린애처럼 도경수에게 이런 말이나 내뱉고 돌아서게 된다. 

"도경수 너 정말 짜증나. 이 개새끼야!!"

종인은 돌아가면서 생각했다. 오늘 기분 나쁜 꿈을 꾼 것도 다 이것을 암시하는 거였나. 그러고 보니 얼핏 그 기분 나쁜 꿈에 도경수가 나온 것 같기도 하다. 도경수 이 나쁜 새끼··· 나는 먼저 사과하러 가는 길이었는데, 자기는 다른 남자랑 스킨쉽을 해? 이건 정말로 도경수가 잘못한 거야! 박찬열이 말한 나쁜 남자 같은 새끼는 사실 제가 아니라 도경수였다.



*




"네, 네 애인···?"

백현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경수는 이제 대답할 기력조차 없었다. 그러니까, 김종인은 친구라고 했는데도 왜 더 화를 내며 가버린 것인가. 정말이지 김종인의 속마음 같은 건 하나도 모르겠다. 도경수가 무감각한 걸까, 아니면 김종인이 더럽게 어려운 걸까! 

그사이 백현은 앞으로 도경수에게 귓속말 따위는 하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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