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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카포(da capo) 31

Kai x D.o.

BGM. Yiruma - Passing By




[카디] 다 카포(da capo) 31

W. 율이



미나는 백현이 떠나간 현관 앞을 응시했다. 아무도 없는 허공, 그러면서도 잠시나마 누군가 있다가 떠나간 자리. 언젠가 또다시 비극이 찾아온다면, 그때는 제가 먼저 그 괴물을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던가. 왜 이제껏 당하고만 있었냐는 듯, 다시 일어서서 그렇게 나아갈 것이라고 했던 적이 있었던가. 그렇게 생각했으면서도 두려웠다. 죽여? 사람을? 나는 똑같은 괴물이 아닌데. 하지만 이 불행을 끝낼 수 있는 건, 그것뿐이라며, 누군가 속삭였다. 죽여, 죽여,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야. 언제까지 이 비극을 견뎌야 하냐고? 나의 종말이 올 때까지? 그것도 아니면 누군가에게 도와달라며 내 비극을 내 입으로 낱낱이 알린 후에야?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아닐 것이다. 미나는 그제야 막 도착한 문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일 보자. 그리고 장소와 시간. 언제나처럼 따라붙어 미나를 두려움의 나락으로 밀어 넣은 여러 장의 사진. 그 속에 갇혀버린 미나의 육체와 영혼.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마침내 해방될 수 있을까? 

이미 미나는, 이성적인 사고 같은 것을 할 수 있을 상태가 아니었다. 아무도 없는 주방에서 과도를 하나 챙겼다. 마침내 내일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미나가 아닌, 미나를 망가뜨린 사람의. 그렇게 이 비극은 끝날 것이다. 이 종말로 인해 언젠가 또 다른 비극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해도, 어쨌든 당장의 이 불행은 내일로써 마무리 짓는 것이다. 드디어, 드디어.




*




방학이 시작된 첫날 아침이었다. 경수는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햇살에 자연히 눈을 떴다.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휴대폰 화면엔 종인에게서 온 메시지가 다량 도착해 있었다. 잘 잤어? 오늘 여행 가는 날. 기대된다. 그치. 그리고 여러 개의 귀여운 이모티콘. 이제는 종인이 어울리지도 않는 이모티콘을 쓰는 것도 익숙해져 있을 참이었다. 경수가 침대에 걸터앉아 어제 챙겨둔 짐가방을 응시했다.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지갑하고 갈아입을 옷과 양치 도구 정도. 물에 뛰어들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속초 바다에 갈 생각이었고, 잠은 근처의 민박집에서 잘 것이었다. 김종인과의 여행. 수학여행 따위의 단체 여행이 아니라, 둘이서만 가는 자유 여행. 이것이 여행이라고 부를 만큼 장대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그래도 여행. 

경수가 작은 가방을 메고 현관 앞에 서니, 어머니가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친구랑 여행 간다고? 네. 별일이야 없겠지만 항상 조심해라. 네. 경수가 대답하자 어머니는 경수의 손에 지폐 몇 장을 쥐여주었다. 감사해요. 경수가 꾸벅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어제만 해도 거세게 비가 쏟아졌던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종인의 소원대로 신의 가호를 받은 것처럼 아주 맑았다. 아, 날씨 좋다. 휴대폰 시계를 확인하니 오전 11시였다. 경수가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지하철역 근처에 도착하니 익숙한 얼굴과 마주쳤다. 한 손은 슬랙스 바지 주머니에 넣고, 한 손으론 휴대폰 화면을 두드리고 있던 미나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긴 생머리가 가슴 아래까지 찰랑였다. 

"김미나."

경수가 앞으로 다가가 먼저 말을 걸자 미나가 무표정으로 경수를 응시했다. 그러다가 이내 경수를 보고 살짝 웃는 것이었다. 도경수. 하고. 

"어디 가?"

경수가 물었다.

"친구들이랑 만나서 밥 먹고, 영화 보고, 디저트 카페도 가고, 그리고 또···"

"그리고?"

"사람 죽이러."

미나가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마치 즐거운 하루를 보낼 거라 행복하다고 말하는 듯, 큰 의미 없는 아주아주 일상적인 말을 내뱉은 것 마냥. 

"무슨 소리야?"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에 약간 놀란 경수가 되물었다.

"뭘 놀라? 농담이야."

이내 미나가 경수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치며 의연하게 말했다. 그녀는 여전히 밝게 웃고 있었다. 그러고선 먼저 갈게. 하며 경수에게 손을 흔들었다. 바람에 길게 날리는 머리칼과 그 뒷모습이 어딘가 가냘파 보였지만, 다시 붙잡진 않았다. 



지하철역에 도착하니 종인이 있었다. 검은색 반바지에 스프라이트 티셔츠 한 장 걸친 종인이 경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평소와는 달리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짙은 쌍꺼풀이 모자 캡 아래 그늘져 더욱 깊게 보이고 있었다. 

지하철을 한 번 갈아타 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인파가 북적하게 몰려들어 있었다. 조금 이른 여름 휴가임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많은 모양이었다. 경수가 미리 끊어 놓은 모바일 티켓을 코드 스캔기 아래에 가져다 대자 예매한 좌석 번호를 기계가 읊었다. 경수가 창가 쪽, 종인이 통로 쪽이었다. 가방을 머리맡 짐칸에 싣고 자리에 앉은 종인이 경수에게 속삭였다.

"다음에는 부산도 가보자, 해운대."

"··· 그래."




*




속초 터미널엔 2시간 반가량 달려 도착했다. 아침도 먹지 않고 나오는 바람에 바다에도 가기 전에 배가 고파져서 편의점에서 구입한 샌드위치와 바나나 우유를 하나씩 입에 물고 걷기 시작했다. 아직 8월이 되지 않았음에도 해수욕장에 인파는 가득했다. 바다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잡아놓은 민박집부터 들렀다. 이 근처에서 가장 싼 곳이어서 그런지 방 안에는 티비도 없고, 가구도 허름했으며, 창밖 경치도 예쁘진 않았지만 둘은 나름 만족했다. 경수가 가방을 정리하며 말했다. 잠만 잘 수 있으면 됐지, 뭘.

바깥에 나오자 따가운 햇볕이 경수와 종인을 쏘아댔다. 아 선크림 안 들고 왔다. 경수가 말했지만 종인이 뭐 별일이냐는 듯 경수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고선 한 손으론 제가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경수의 머리에 씌워주는 것이었다. 나는 원래도 까매서 괜찮은데, 너처럼 하얀 애들은 피부 벗겨지니까 이거 쓰고 있어. 하고. 햇살 아래로 막연히 드러난 종인의 얼굴이 해사했다. 

파라솔은 빌리지 않았다. 어차피 가지고 간 짐이 없었기에. 처음에는 물에 들어가길 잠깐 주저했으나, 한 번 시원하게 빠진 이후론 신나게 물놀이를 즐기기 시작했다. 종인이 바닷물을 먹어서 한동안 캑캑거리자, 경수가 옆에서 웃어댔다. 즐거웠다. 경수는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이 순간이 너무나도 행복하다고. 물 아래에서 맞잡은 손이 이렇게나 사랑스럽다며. 


해가 떨어지기 전에 민박집으로 돌아와 씻고 난 후, 옷을 갈아입고 저녁을 때우기 위해 다시 바깥으로 나왔다. 점차 붉었던 노을이 완전히 사라지고 어둠이 하늘을 뒤덮을 때쯤, 시장에서 맛있어 보이는 음식 몇 종류 사서 다시 민박집으로 돌아와 먹었다. 후엔 맥주도 좀 마셨다. 경수와 종인이 나란히 술을 사 들고 민박집으로 돌아올 때, 주인아주머니가 경수를 약간 훑어보며 의심하는 듯한 눈초리였으나, 이내 경수의 곁에 서 있던 종인을 쳐다보곤 말없이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종인도 아주머니의 눈빛을 느꼈는지 경수에게 말했다. 이걸 좋아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그에 경수가 또 큭큭 웃으며 답했다.

- 너랑 있으니까 편하네.

멀리서는 산란히 뛰노는 듯한 꼬마 애들의 목소리와, 폭죽 소리가 옅게 들려왔다. 저녁이 되니 날이 조금 시원해져 경수와 종인이 마루에 앉아 하늘을 쳐다봤다. 여기도 별 많네- 종인이 경수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으며 말했다. 

한동안 마루에 앉아 과자를 집어 먹으며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경수의 바지 주머니에 들어있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리는 게 느껴져 휴대폰을 꺼내 드니, 전화가 오고 있었다. 백현이었다. 받을까 하다가 앞에서 누구냐고 물으며 경수를 빤히 쳐다보는 종인을 보고 수신 거절 버튼을 누른 뒤, 다시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하지만 다시금 진동이 울려왔다. 결국 경수는 휴대폰의 전원을 끄는 것을 택했다. 그저 이 행복한 순간을 당장 방해받고 싶지 않았던 걸까. 경수가 휴대폰에 머물던 고개를 들어 종인의 얼굴을 쳐다봤다. 경수의 눈과 마주치자 자동반사처럼 순수히 휘어지는 종인의 눈이 예쁘게 반짝였다. 마치 하늘에서 빛나는 별처럼. 아니, 그보다 더 찬란하게. 


"가끔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내 사촌들을 떠올릴 때가 있어."

맥주를 한 모금 마셔 넘긴 종인이 문득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늘을 응시하고 있는 그의 눈빛은 찬란히 웃던 방금과는 다르게 조금 공허히 느껴졌다. 

"조금 궁금하더라고. 고모는 어떤 사람일까. 아빠의 가족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고모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다면 나보다 동생이었을까, 형, 누나였을까. 아니면 동갑내기 친구였을까."

"······."

"그랬으면 너처럼 그렇게 사이좋게 지낼 수 있었을까, 하고. 그게 아니면 외동아들이 아니었으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고."

"······."

"무의식적으로 외롭다고 생각했었나 봐. 그래서 사람을 사귀고, 사랑하는 데 더 집착하기도 했던 것 같아."

종인이 하늘을 응시하던 눈빛을 거두고 경수를 바라봤다. 종인이 작게 웃었다.

"아빠는 어릴 때 집 나와서 한 번도 가족을 다시 만난 적 없다고 했지만, 나는 기회가 되면 언젠가 보고 싶어. 내 또 다른 가족들 말이야."

"그럴 수 있을 거야."

경수가 마루에 드러누우며 조용히 읊조렸다. 그러자 종인이 응? 하며 쳐다봤다. 

"하고 싶은 것 다 할 수 있을 거라고."

"······."

"너는 왠지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떠올린 것이다. 끝끝내 도망치려던 도경수를 붙잡은 김종인의 손을. 어느 순간 제 마음속에 찬란히 비집고 들어와 점점 더 커져 버린 김종인을. 좋아해- 하고 말하던 종인의 입술이 예쁘게 움직이던 것을. 수줍은 종인의 손이 맞닿은 도경수의 손 틈 사이를. 너는 그런 사람이라고. 종인아, 너는 그런 사람이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경수가 아, 피곤하다- 하며 기지개를 켜자 종인이 웃으며 말했다. 이제 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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