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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카포(da capo) 45

Kai x D.o.

[카디] 다 카포(da capo) 45

W. 율이



CHAPTER 4. 끝의 너머


꿈을 꾼다. 지긋지긋한 꿈속에선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또다시 느낀다. 끝이 난다면 썩 좋지 않을 무언가의 끝. 발밑의 무한한 암흑이 의미한 것은 저의 소중한 친구 김미나의 끝이었고, 제가 놓쳐버린 옛 애인 김종인과의 끝이었다. 사방에서 외친다. 저곳이 무섭니? 하지만 저 비극도, 암흑도 네가 만든 거야. 네 손으로 직접 만들어, 네 그 두 발로 걸은 거야. 여기까지 다다른 건, 모두 네가 선택한 길이야! 꿈속의 도경수는 소리친다. 알고 있어. 나도 알고 있다고! 모두 끝났어. 모든 것이 도경수의 과오로 인해 끝났어. 하지만 또다시 들려오는 이 웃음소리는 신의 웃음소리일까, 또는 악마의 속삭임일까, 그것도 아니면 내면 어딘가의 울림일까.

- 그래서 그 끝을 경험한 기분이 어떤 것 같니?

싫어요. 슬퍼요. 고통스러워요. 경수가 대답한다. 여전히 일자로 뻗은 도경수의 길 앞에는, 끝없는 암흑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끝이었지만, 끝이 없는 그 암흑만이. 저곳의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을 그런 어둠만이. 비로소 그 어둠이 의미하는 것은 또다시 '끝'이었음을, 더 이상 너를 밝힐 빛은 없다는 듯. 그리고 누군가 외친다. 공중에서 울려 퍼진 목소리는 경수를 거세게 두들긴다. 그런데 그거 아니? 끝은 없어. 네가 이렇게 살아있으니, 끝이라고 생각되는 그곳의 너머만이 존재할 뿐. 환청은 수십 번, 그리고 수백 번 메아리쳐 돌아온다. 끝은 없어, 끝은 없어, 끝은 없어- 마치 이 메아리의 끝도 없다는 듯. 


그리고 경수가 잠에서 깨어났을 땐, 아직 동이 트지 않아 어둑한 새벽녘이었다. 경수는 자리에 누운 채로 머리를 두 손으로 부여잡았다. 꿈에서 깨어났음에도 여전히 꿈속에서 들었던 환청이 작게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끝은 없어. 그러니까 포기하지 마. 어쩐지 눈물이 옆으로 떨어져 베개 시트를 적시고 있었지만, 슬프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흘러가는 시간이 야속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 순간, 또다시 종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다짐했었지 종인아, 비로소 나는 너를 찾을 것이라고.




*




"눈 오네."

그렇게 말한 종인의 손바닥엔 정말로 하늘에서 일렁이던 눈송이가 하나둘 내려앉고 있었다. 새해 첫날이 되자마자 종인은 고모가 구해준 새로운 오피스텔로 제 짐을 다 옮기기 시작했다. 종인은 제가 처음 고모 집에서 지내게 되었을 때, 고모가 이렇게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불편하면 혼자 지낼 방을 구해주겠다고 했던 것 말이다. 종인이 고모의 집에서 나와 새로운 오피스텔에서 살겠다고 선언한 것은, 고모네 가족이 저를 구박한다거나, 서로 간의 트러블이 있었다거나의 문제로 불편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종인이 그 단란한 가족 사이에 끼지 못했던 것뿐이다. 그 문제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18년 만에 처음 본 사람들과 친하게 지낼 수는 있어도, 가족처럼 지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종인은 고모에게 잠만 잘 수 있다면 지하 단칸방이라도 좋다고 했으나, 고모는 종인에게 꽤나 큰돈을 들인 오피스텔을 하나 구해다 주었다. 꼭 갚을게요. 종인이 말하자 고모가 종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더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렇게 말하던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녀는 이어서 말했다.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렴. 나를 네 엄마처럼 편하게 생각해도 좋아. 결국 조금 울음을 터뜨린 종인을 고모가 살짝 끌어안았다. 네, 감사합니다. 종인이 말했다. 

새로 구한 오피스텔은 학교와 꽤 가까운 곳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전학을 감행한 이후로 제대로 등교한 적도 없었고, 배정받은 반의 담임 교사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했으니 아직까지는 크게 도움 된 적이 없었으나 어쨌든 고모는 학교까지 배려해서 이곳으로 구해준 걸 것이었다. 오피스텔은 큰돈을 쓴 만큼이나 좋았다. 방이 하나 딸린,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축 건물이었기에 벌레가 나오지 않는 것은 물론, 방음도 잘 되고 물도 잘 나오고 보일러도 빵빵하게 틀 수 있다는 점은 종인에겐 꽤나 신선한 것이었다. 다만 고모네 집도 마찬가지였지만 그곳은 얹혀산다는 느낌이 강했다면 -실제로도 맞고- 이곳은 제집이라는 느낌이 들었으니 그러한 느낌이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곳으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세훈은 자주 들락날락하곤 했는데, 보통은 술판이나 벌이자며 오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가끔 종인이 술에 취하면 그에게 전 애인이라는 이름으로 도경수의 얘기를 하기도 했다. -다음 날 아침이 되면 둘 다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다분했지만-

하지만 그럴수록, 종인은 도경수의 얼굴이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도경수의 머리칼이, 눈썹이, 눈이, 코가, 입술이 어떠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사라지고 있었다. 제가 사랑했던 도경수라는 존재가. 맞아, 이별은 그런 것이었지. 그렇게 생각하니 실소가 터져 나왔다. 어차피 끝은 다른 애인들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었으면서, 왜 그렇게 집착하고 매달렸었는지. 이렇게나 쉬운 것이 연애를 끝낸다는 것이었는데. 어쩌면 이것은 도경수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오랫동안 보지 않아서 그런 걸 수도 있고, 그의 낮고 차분해 제가 좋아했던 목소리를 오랫동안 듣지 못해서 그런 걸 수도 있고, 그의 희고 아름다운 육체를 오랫동안 만지지 못해서 그런 걸 수도 있다. 어찌 됐든, 종인은 더 이상 도경수를 떠올리지 않는다. 도경수도 그러하겠지. 도경수는 진작부터 김종인을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어쩐지 저도 모를 눈물이 눈에 맺히곤 했다. 완연히 도경수라는 소년을 놓았다고 생각했는데 도경수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사실만 생각하면 그렇게도 비참했다. 슬펐다. 고통스러웠다. 왜, 더 이상 그의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으면서 왜. 그랬으면서 저를 향해 웃어줬던 천진한 미소만이 추억 속에 남아 둥둥 떠오르는 것은 왜인지. 




*




종인이 오후 1시가 넘어서야 깨어난 그날도 다른 날과 별반 다르지 않은 날이었다. 거실에 고모가 장만해준 소파 위엔 세훈이 퍼질러져 자고 있었고, 바닥엔 소주병과 맥주병이 잔뜩 널브러져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처럼 되지 않으려면 술 좀 그만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세훈과 어울리기만 하면 과음을 해버리는 탓에 세훈을 집에 들이는 것도 이젠 조금 자제해야겠다고 다짐하던 참이었다. 거실에 위치한 작은 모니터 겸 티비는 언제 틀어져 꺼지지 않은 것인지 드라마 재방송을 방영하고 있었다. 그에 종인이 소파 구석에 자리한 리모컨을 들어 티비를 끄자 그제서야 세훈이 헝클어진 머리를 긁으며 자리에 일어나 앉는 것이었다. 

"야 좀 가라. 고모가 안 찾냐?"

종인이 아무렇게나 벗어 널브러져 있던 양말을 세훈에게 던지며 말했지만 아직 잠에서 덜 깬 탓인지, 아니면 대답하기도 귀찮았던 탓인지 그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래서 종인이 덧붙였다.

"나 나갈 거니까 알아서 씻고 가라."

"어디 가는데?"

"산책."

종인은 신발장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운동화를 꿰어신고 현관을 나섰다. 1층에 머물러있던 엘리베이터가 종인의 층에 다다르자 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종인이 이렇게 혼자 집을 나선 것은 예전에 살던 집에 가보기 위함이었다. 며칠 전 고모는 종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 너 예전에 살던 동네, 재개발한다고 해서 집 팔았던 것 기억하니? 거기 이제서야 철거 시작한다더라.

하긴 종인이 생각해도 그 골목엔 사람도 많이 안 살았고 다 무너져 가던 집만 수두룩했으니 이제라도 재개발하는 게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재개발 이야기는 들었었던 것 같은데 정말 철거한다고 하니 조금 기분은 이상했다.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한 번 가보자. 뭐,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도 18년을 살았던 곳인데. 

종인은 야상 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거리를 걸었다. 조금씩 흩날리던 눈송이들과 더불어 빗방울이 모자 위로 조금씩 떨어졌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조금 뒤에 도착한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하나 잡아탔다. 버스가 덜컥거리며 옅게 쌓인 눈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창문 밖에는 진눈깨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




그리고 종인이 눈길 위를 달리던 버스에서 내려 녹슨 대문 앞에 다다랐을 때,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가던, 그럼에도 생각하면 눈물방울들이 제 옷을 적시게 했던 그 소년을 마주할 수 있었다.

도경수. 순수히 사랑했었던 작은 그의 뒷모습을. 문 너머에도 없는 김종인을 찾으려 애타게 녹슨 철문을 두드려 발갛게 달아오른 그의 손을. 마침내 고개를 돌려 김종인을 쳐다보던 그의 두 눈을.

"··· 도경수."

어쩐지 마주치니 또다시 눈물방울들이 무던히도 흘러내렸던 건 단순히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너의 얼굴을 다시 마주해서인지, 아니면 그동안 좇을 수 없어 외롭게만 남아있던 미련 때문인지, 어쩌면 여전히 너를 사랑하고 있어서인지.

"종인아···."

"······."

"찾아서··· 다행이야."

"······."

"보고 싶었다고 말하고 싶었어."

마침내 그 모든 이유가 후자 때문임을 알았을 때 찾아온 그 환희는 무엇이었는지. 


여전히 경수는 종인의 축축이 젖어 든 두 눈을 마주 보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리던 진눈깨비가 종인이 쓴 야상 모자 위에 다분히 떨어져 스며들고 있었다. 경수가 이쪽으로 다가와 종인의 모자 위를 한 손으로 쓸어내리며 말했다. 너 감기 걸리겠다. 

이미 제 머리칼은 축축이 젖어 얼어붙었음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그런 것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건지. 그랬으면서 발갛게 부어오른 손으로 김종인을 걱정한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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